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우스 카이사르 (문단 편집) == 사생활 == 카이사르는 개인적으로 망신스러운 추문과 신체적 콤플렉스에 시달렸는데, 공적인 곳에서는 그가 초급 장교 시절 비티니아 왕실에 파견나가있을 무렵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 [[동성애]] 관계, 그것도 [[공수(동인)|수 역할]]을 했다는 소문[* 당시의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동성애가 용인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는데, 동성애는 나약한 그리스식 취미 취급을 받았고 더군다나 동성애에서 수동적 역할 즉, [[바텀(성소수자)|삽입 당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노예나 할 법한 '여성적' 역할로 보아 로마 시민이 남창 영업을 하다 적발되면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죄였다.]이 그를 따라다녔다. 지독한 인신공격이 일반적이던 정계에서 카이사르의 정적들은 온갖 추악한 언사로 짓궂게 그를 비웃었다.[* 돌라벨라는 카이사르를 "왕비의 연적"이라고 불렀고, 메미우스는 그를 '연회에서 종 노릇을 했다'며 비난했다. 특히 화려한 웅변 실력을 인신공격에 쓰던 키케로는 '베누스의 후손이 비티니아에서 청년막을 따였다'며 조소했고, 후일 니코메데스의 딸인 니사를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변호하자 "집어치우시오. 그와 당신이 뭘 주고받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라고까지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카이사르의 정적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그와 집정관으로 집권하던 해에 그를 동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 유명한 "비티니아 왕비"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나 정작 비불루스는 그 해에 카이사르에게 완전히 정치적으로 농락을 당했으니 아이러니하다.][* A.골즈워디 같은 현대 사가들은 정적인 원로원파들이 당시 로마인들에게 퍼져 있던 동방, 동방 왕실에 대한 경멸 및 혐오감과 동성애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등을 민중파의 우두머리이자 독재자인 카이사르에게 엮어 권위를 실추시키는 정치 선전에 써먹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본다. 어쨌든 가십을 좋아하는 수에토니우스의 이야기가 출전이므로 이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사적으로는 나이가 먹자 [[탈모|시대를 불문한 남성의 고뇌]]에 시달려서 대머리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M자 탈모가 와서 이마가 벗겨지자 [[대머리|이 신체적 약점이 정적들에게 놀림을 받게 되었고]], 머리를 뒤에서 앞으로 빗어서 대머리를 최대한 가리려는 가련한 시도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 탈모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바코드' 스타일을 말한다. 이 때에도 대머리의 애환은 다 똑같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준 모든 특권이나 영예 중에서도 월계관을 쓰는 특권을 특별히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당연하지만 대머리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가 개선식을 할 때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개선식에서 병사들이 개선 장군의 체면을 깎는 희극적인 구호를 외치는 게 전통이었다. 개선장군이 너무 교만해지면 신들의 질투와 미움을 사게 될까 우려해서 일부러 신들이 들으라고 소리치게 됐다고 한다. 동시에 당당하게 대중 앞에 선 개선 장군을 신나게 놀려먹음으로써 개선식 행사의 분위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고 시민들에게 [[문민통제|로마의 군대는 친절하고 유쾌한 시민의 군대]]라고 홍보하는 효과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 병사들이 선택한 구호는 밑에서 언급하는 동성애 스캔들 구호와 아래의 구호였다. >'''"갈리아는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했고, 카이사르는 니코메데스 왕에게 정복당했다네. 갈리아를 무찌르고 개선하신 카이사르가 납신다!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데도 니코메데스 왕은 월계관을 쓰지 못했다네. 대머리 난봉꾼[* 실제로 카이사르는 여성편력이 굉장히 심했다.] 카이사르가 납시니, 로마인들이여, 어서 마누라를 숨겨라! 그는 금덩어리를 빌려 쓰고는, 고작 갈리아 창녀로 갚는다네."''' > - <카이사르의 생애> 中 "로마 군단의 개선행진가" 필립 마타작 저 "로마 공화정"에서. 여하간 이른 탈모는 카이사르에게도 계속 콤플렉스였는지 [[클레오파트라 7세]]와 동거했을 시절에는 그의 탈모를 개선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쥐를 태운 재에 곰의 기름과 사슴 뿔을 섞은 약을 만들어 주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탈모를 멈출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수의 유부녀들과 염문을 뿌렸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지만) 각종 원로원 의원 등 유력층 인사들의 아내는 물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등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의 아내와도 태연하게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유명한 애인 소동은 기원전 63년 카틸리나의 탄핵 당시 카틸리나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던 카이사르가 스캔들을 이용해 그 의심을 한번에 떨어버린 이야기이다. 원로원 회의에 참석 중이던 카이사르에게 웬 서신 한 통이 전해졌는데, 카이사르가 서신을 읽자 카이사르 반대파인 [[소 카토]]가 갑자기 일어나 카이사르가 읽고 있는 서신이 카틸리나 일파와 내통하는 증거[* 당시 카틸리나의 정치적 목표가 바로 채권자들에게 부채 전액 탕감을 강제하는 것이었는데 카이사르도 빚을 엄청나게 지고 있어서 한패라는 의심을 받았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카이사르가 지극히 사적인 서신일 뿐이라고 응수하자 카토는 더 기세등등해졌고 결국 카이사르는 그럼 카토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서 낭독하라면서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서신의 내용은 사실 [[소 카토]]의 이복누이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가 카이사르에게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먼저 회의 중 무슨 편지를 적어 시종 편에 보냈고, 거기에 온 답장이 세르빌리아의 편지였다고도 한다. 이 전개를 따른다면 카이사르가 자신에 대한 의심도 딴 데로 돌리고 겸사겸사 카토도 망신 좀 줄 생각으로 작정하고 회의 중에 세르빌리아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소 카토는 한마디도 낭독하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내던지며 "작작 좀 밝혀!"라고 소리쳤고 원로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책에 따라서는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혹은 "(당신 편지나) 가져가, 이 바람둥이야!"라고 나오기도 한다. 어쨌거나 기세등등하게 카이사르를 몰아붙였다가 망신당하게 생겼으니 비난을 쏘아붙였다는 건 동일. [* 참고로 그녀의 자식은 그 유명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다.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정말 사랑했던 여인이 세르빌리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브루투스를 너무 아낀 나머지 이런 야담까지 나왔다. 그러나 브루투스 본인은 그 말 때문에 시달려서 싫어했다.][* 연애 편지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이때 지속적으로 공권력에 의한 채무 강제 탕감을 주장한 카틸리나에 대한 여론이 하도 나빠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에 대해 "일단 재판을 하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군대로 감시하자"라는 발언을 했다가 어그로가 끌린 군중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법적으로는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가 옳았고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즉결처분]]하는 건 불법이었다. 한마디로 재판 판결도 혐의 입증도 없이 그냥 죽인 셈이어서, 카틸리나 사후 제정신이 돌아온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이 재판도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그 책임을 물어 키케로를 마녀사냥하게 된다.] 그의 자금 스폰서인 크라수스도 제 아내가 넘어갔지만 어쨌든 계속 군자금 융통을 해주었다. 단순히 채권뿐 아니라 크라수스 본인이 카이사르의 매력에 빠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크라수스는 자기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를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시작했을 때 맡기기도 했는데 카이사르도 그를 '젊은 크라수스'라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정치적 협력자에 대한 배려도 있었겠지만 상당히 유능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 대한 로마 시내의 중평은 '''솔개에게서 매가 태어났다.'''였다고.] 자신의 정적이 되는 폼페이우스의 아내하고도 바람을 폈으니 어떤 의미에서 [[삼두정치]]의 알파라 할 수 있을 듯. ~~그리고 자신이 바람핀 피해자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이 외에도 장가를 여러 번 갔는데, 주로 정치적인 목적.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정치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첫 번째 부인인 코르넬리아와는 차라리 이혼하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이었는데도 당시 독재자였던 술라가 이혼하라는 명령도 거부하고 튀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자신은 민중파라는 것을 술라를 비롯한 보수파들에게 알린 일화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자신은 마리우스를 지지하기에 술라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뜻. 이후로 카이사르는 자신이 마리우스와 혈연이면서 민중파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다녔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 원로원의 견제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사실 당시 로마의 절대 다수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현대적 의미의 연애 결혼은 단적으로 말해 19~20세기에 영미권에서 발생한 개념으로 봐도 좋다. 다만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 드루실라|리비아]]와 오로지 사랑만으로 결혼을 했다.[* 그래도 합법이기는 했다. [[리비아 드루실라|그 유부녀]]의 남편이 결혼식 [[들러리]]를 해줬다고 하고, 전 남편의 자식 2명(그중 임신 중이던 둘째가 불륜의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지만)을 모두 떠맡았으며 데려온 자식 중 [[티베리우스|첫째]]가 결국 후계자가 되기도 했다.][* 다만 이건 드루수스가 일찍 죽어서 그렇게 된 거고 만약 드루수스가 오래 살았다면 황제 자리는 당연히 드루수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애시당초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반면 드루수스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형제의 사이는 지극히 좋았다. 만약 드루수스가 황제가 되었다면 그의 부족한 부분을 티베리우스가 채울 수 있어서 매우 이상적이었을 지도...] 카이사르가 여성들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들은 사후 신격화가 되면서 엄격하고 냉정한 성격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싸그리 사라졌다. 카이사르가 남긴 편지들은 '신적인 인물'이 작성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감정이 녹아들어 왕조의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시조가 수많은 여자들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기록을 일부러 삭제한 것이다. 후손들에겐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크라수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카이사르는 바람둥이 노릇을 하면서도 여자 문제 때문에 중요한 인간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이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의 염문에서도 드러나는데,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를 즐기면서도 로마에서건 이집트에서건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고, 그러면서도 클레오파트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은 묵인했다. 즉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여왕과의 관계를 이집트를 관리하는데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로마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적절하게 줄타기를 한 것이다.[* 1999년작 프랭크 로덤 감독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선 작중 클레오파트라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클레오파트라와 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와의 결혼을 제의하는데, "저런 코흘리개 어린애하고 결혼하기 싫다"라고 투덜대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여왕이 되었으면 여왕처럼 생각하는 방법도 배워라. 프톨레마이오스와 부부가 되면 그의 군대를 합법적으로 해산시키고 당신의 반대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겠냐.'''"라며 일침을 놓는 장면이 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을 아들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언장에도 카이사리온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언급은 한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유일한 남자 자손이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카이사르는 그렇게 염문을 많이 뿌렸지만 후손은 공식적으로 딸밖에 없었고 그 딸도 이미 카이사리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카이사리온이 아닌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후에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서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것과 대조적이다. 당시에 로마인들 기준에서 카이사르의 행위는 법적으로 간통으로 보지 않았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명백한 간통이었다. 당시에 남자가 여러 첩을 두어도 상관은 없었으나 문제점은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는 쪽이 문제가 되었는데 하필이면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여론으로 보아도 명백히 로마를 배신하는 듯한 이미지인 클레오파트라를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결혼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카이사르는 그냥 클레오파트라를 자신과 그냥 밤을 나눈 여자라고 생각하고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아 당시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스캔들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많은 여인들과 연애설을 뿌리고 다녔지만 정작 본인은 간절히 원하던 적자를 얻지 못했다. 첫 아들은 유산되었고, 유일하게 언급된 분명한 혈육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카이사리온뿐이지만 그는 [[사생아|절대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사실상 남남]] 취급이었고 그 외에 여러 여인들에게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기 친인척 및 가문 사람들을 대거 기용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큰 힘이 된다. 사실상 부관이나 다름 없던 안토니우스도 친척. 비록 양자를 들여서 가문의 대를 이었지만 본인의 피를 이은 적자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을 거라고 하는데, 기록에는 남아 있지를 않다.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참살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적통은 대가 끊겼다. 드라마 [[ROME]]에서는 카이사리온이 죽지 않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대체역사로 흘러가고 PS2 게임 '아르고스의 전사'에서는 카이사리온의 죽음에[* 사실 살아있었다. 주인공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진짜 정체가 바로 카이사리온.] 보복하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가 악의 여왕으로 부활한다는 설정이다. 이러나 저러나 카이사르는 끝내 자식 복이 없었고 그렇기에 미련 없이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정통성을 다 몰아줄 수 있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솔직한 심정이야 이집트의 카이사리온에게 뭔가 한몫 떼어주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이 구상한 로마 제국의 계획을 망칠 수 있기에 씁쓸한 심정으로 넘어갔을지도. 참고로 많은 소설가들이 카이사르가 이상할 정도로 옛 연인이었던 세르빌리아에게 잘 대해주고 아들인 브루투스에게까지 호의를 베풀자 사실은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소문을 채용해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남몰래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알고 그렇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소설도 나오고 있지만, 그가 정식으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사후에 신격화되어 세워진 '카이사르 신전'은 왠지 로마에서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자주 쓰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카이사르가 흐뭇하게 내려다보지 않았을까 하면서. 참고로 카이사르의 가문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후손을 자칭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